본문 바로가기
글읽기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 보르헤스 외

by 무하뉘 2023. 12. 6.

 

 

 

 

제목이 참 매력적인데...

단 하나의 빗방울도 모르겠다.

 

뭔가 알듯 모를듯 신비함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거기까지인듯....

 

나는 읽어내지를 못한다.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면서,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최소한의 해석의 능력조차도 없다.

 

하지만 무력감에 좌절하지는 말아야지.

우선 불쌍한 번역가를 탓하기로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읽을수 있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당한 비판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번역가라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생각하고 조금은 부당한 번역의 불완전함을 이유로 욕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또다른 핑계거리는 전자책의 음성읽기 기능을 통해 읽었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댈수도 있겠다. 자주 놓칠수 밖에 없고, 책마다의 고유한 리듬을 읽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책의 흐름과 동기화가 되질 않는다.

 

번역가와 기계음성 탓만 하기도 뭐하니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본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서두에 나와있었던대로 단편이기때문에 있을수밖에 없는, 삭제된, 생략된 빈 공간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수묵화처럼 여백의 미가 있을 수도 있고, 지적 활동을 위한 숙제일수도 있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위한 작가의 배려일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 공백을 잘 즐길수 있는지 모르겠다. 소시적의 총명함을 되찾을 수 없는 나이탓인걸로 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언제나 텍스트제1순위주의를 택하는 나는, 컨텍스트가 없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종종 간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작품들마다 품고있는 내적실재에 대하여는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적인세계, 말하자면 현실세계와 1대1로 대응하지 않는 작품들을 만났을 때,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 작품의 세계속에서 그냥 느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혹시라도 뒤에 숨어 있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해석하고 공부하는 학생처럼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창조.

 

스토리의 서사가 없으면 읽혀지지 않고, 할 말이 없는 것은, 나에게 창조적  독서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A라는 세상을 그려줄때 나는 Z라는 세계를 읽었으며 거기엔 존재하지 않지만 새로이 탄생한 혹은 탄생할수 있는 또 다른 X라는 세계를 이야기하고싶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습은 잠재성의 바다에서 수면위로 나오지 못한것들을 제외한 것들의 집합. 수면으로 나온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빌빌 꼬아서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수면아래의 잠재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심연의 보이지 않는, 잉태되지 않은 잠재성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내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을 뺀 나머지인 것이라고 말하는것이다.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태라는 표현들이 좋다.

(어디선가 본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꿈꿀 수 있으니까 좋다.

뭐 어렵게 써지긴 했지만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싶은가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문장이다.

 

 

집중되지 않는 번역이지만 또 번역가를 탓하고 싶지는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그림들이 끔찍할 정도로 아름답다.

 

어렴풋한 시간에서의..... 우리가 보통 자극적이라고 말할만한 묘사들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멜은 얼핏보면 별 생각없고 행동은 조금 거칠기도 하고 둔해보이고 하는 행동들을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내면의 예민함과 우울함이 작가의 문장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사실 정확한 표현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 완전히 혼자일수는 없겠지만, 주위와의 내면의 단절이 익숙한 사람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칠고 보기 끔찍한  상처로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닐까?

 

전제를 다 꿰뚫고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외로움을 말하고 싶다. 문학의 특성상 화자의 독백이나 관찰자의 건조한 시선은 나를 한 발자국 떨어져 있게 한다. 그곳엔 왠지 모르게 외로운 향기가 흩어져 있다.

 

읽고 상상하고 느껴보면서, 그리고 생각들..

생각이 문제다. 생각없이 살수 없지만 생각때문에 제대로 살수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을 많이 읽으면 부작용이 있을수 있다. 그래서 잘 읽지 않는다.

때때로 화자의 입장이 되어 소설의 문장과 같은 독백을 읊으며 행동할수가 있기때문이다.

그 목소리들은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고독일수도 있다.

그리고 약간의 혼란과 어지럼증을 동반할 수도 있다.

 

나는 이라고 말했다가 그는 이라고  말했다가,

문장이 되어버린 현실은 마침표를 잃고, 언어의 규칙도 잃는다.

어느 순간 나라는 것의 정체성을 잃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순간들의 어두운 우울은 때로는 기분좋은 위로이기도 하고 괴롭고 고통스런 고문이기도 하다.

 

보통은 무난무난한 성격이기도 하고 예민함이나 세심한 같은것은 내게 주어지지 않은 특성이지만 때때로 인생에는 어긋남이라는 도통 쓸모없어 보이는 우연의 선물이 있다. 보르헤스의 바빌론복권이 떠오른다. 내일은 복권이나 사볼까싶다.

 

 

한줄평 : 영화보다 오래가는 이미지를 남겨주는 책

평점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