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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미로 속에서 상징, 해석, 그리고 인간의 이해 - (해석학,기호학,프루스트와 문학)

by 무하뉘 2023. 12. 21.

 

 

우리 앞에 놓인 사물 형상이 무엇을 닮았는지 판별하고 규정하는 법칙을 기호학이라고 한다면, 그 기호가 의미하는 바를, 또는 그 기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법칙을 해석학이라고 한다. 기호학이 유사 및 동질성에 고민한다면 해석학은 차이 및 이질성에 고민한다. 기호의 복선이 기호학의 고민이고 해석의 복선이 해석학의 고민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얼굴이고 다르면서도 같은 얼굴이다.........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표현이란 생각을 언어로 옮기는 것이었고, 해석은 언어에서 생각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었다.

 

-진동선, 사진해석학 중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빠져들어와 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어느새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조차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동시에 실용성의 현실세계에 돌아와 생각해본다. 기호학과 해석학이란게 있다 치고, 나는 그럼 새로운 어떤 학문을 만들어볼까나? 사물현상이 무엇을 표현하고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영향력을 미치는지 연구해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말이 안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다 연구해본다는 말이고, 이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각자의 인생을 걸고 연구하고 있는 부분들인데 그걸 다 알고 싶다는 말이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두 섭렵한 파우스트 조차도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데 말이지.....

 

그냥 프루스트나 읽어야지 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펼쳐본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그 사람에 대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관념들이 그 사람의 두 뺨을 완벽하게 부풀리고, 거기에 완전히 부합되는 콧날을 정확하게 그려 내고, 목소리 울림에 마치 일종의 투명한 봉투처럼 다양한 음색을 부여하여, 우리가 그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관념들인 것이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음 그래....우린 너무나 깊이 관념속에 빠져 있어서 우리가 어디에 빠져들어가서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 그런데 프루스트의 "아는 사람"이라는 기호를 본다는 것은 "관념들"을 본다는 것이고, 그 관념들을 해석하는 것은 차이와 이질성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무엇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은 잘못된 해석을 반복하고 있는 어리석은 행동의 연속일뿐인건가?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뭔가 오류가 있는걸까? 단지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려하는 프루스트에게서 무의미한 허무주의를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다. 너무 많이 갔나보다.

 

다행히 켈트족의 신화가 있다.

 

나는 켈트족의 신앙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어떤 열등한 존재나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 속에 갇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나무 곁을 지나가거나,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때때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합리적인 켈트족의 신앙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사물에게서, 사물로부터 우리의 잃어버린 한 존재, 유폐된 영혼을 일깨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관념들에게 둘러쌓여 길을 잃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들 덕분에 사물로부터 잃어버린 영혼을 깨워 일으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새로운 성질이란게 성질이 변한 것에 불과하므로, 나는 이 작은 회색 알맹이 속에서 아직 영글지 않은 초록빛 싹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특히 작은 금빛 장미처럼 매달려 있는 가냘픈 줄기들의 숲 속에서 그 꽃들을 드러나게 하는 부드럽고도 창백한 분홍빛 광채는 - 지워진 벽화가 있던 자리를 말해 주는 희미한 빛처럼, 보리수나무에서 '색깔이' 있던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차이를 나타내 주는 표시인 - 내게 이 꽃잎들이 약봉지를 장식하기에 앞서 봄날 저녁을 향기롭게 해주었음을 말해 줬다. 이 분홍빛 촛불, 그것은 여전히 보리수 색깔이긴 했지만, 이제 꽃들의 황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들의 줄어든 삶 속에서 반쯤 꺼진 채 졸고 있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화자가 레오니 아주머니께 보리수차를 드리기 위해 보리수잎을 꺼내며 떠올리는 생각들을 적은 부분이다. 문장을 읽다가 프루스트를 읽으며 김인희 시인의 에세이를 뒤적거려보게 된다. 그리고 뭔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한 문장에서의 마침표와 식물의 씨앗과 블랙홀의 우주적 위치는 같다. 그 마침표와 씨앗과 블랙홀에는 모든 기억이 응축되어 있어 어느 한 시점에서 다시 정보를 방출하기 때문에 그 문장과 식물과 시공은 존재한다...... 한 문장이 갖는 마침표나 우주에서의 블랙홀은 한 그루의 나무 혹은 꽃 한 포기가 생애를 마치면서 남기는 씨앗과도 같은 것, 혹은 한 생애가 새로 시작되는 씨앗과도 같은 것이다. 마침표와 씨앗은 블랙홀이 우주공간에 생겨난 과정과 똑같이 생겨난다. 마침표는 문장 속에 나타난 여러 의미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대폭발(감동)의 순간을 거쳐 하나의 의미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식물의 씨앗도 마찬가지다.꽃(대폭발,감동)의 단계를 거쳐 꽃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하나의 조그만 알갱이, 씨앗 속에 담는다. 어느 시점에서 환경이 갖추어지면 씨앗은 저장했던 정보를 다시 방출하고 한 생애를 다시 시작한다. 즉 마침표라든가 씨앗이라든가 블랙홀은 한 생애 동안 빨려 들어간 에너지 혹은 빛을 체계적으로 다시 방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김인희, "언어게놈지도" 중에서

 

기억이라는게 도대체 뭐길래 자꾸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기억에게 너무나 절대적인 권력을 맡기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란 인간이 참 한심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기호학과 해석학이라는게 뭘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해서, 관념의 이미지인지 이미지의 관념인지 모를 그 것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사물현상으로부터 그 관념의 이미지, 이미지의 관념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켈트족의 신앙을 법전으로 삼아 영혼을 해방시키려 하고, 보리수잎으로부터 씨앗의 생애를 떠올리고, 마침내 마침표와 씨앗과 블랙홀의 우주적 위치와 그들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지러운 여행의 끝이 어딜지 모르겠다. 오늘의 한 문장은 실패작이면서도, 위대한 켈트족의 신화와 마침표와 씨앗과 블랙홀의 우주적 위치에 대해 조금쯤 이해하면서 뭔가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생겨난다. 어떤 영감일까?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늘어난것이라고 해야할까? 끊임없이 세상의 흐름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죽기전에 단 한가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엇을 배울것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이 세계의 흐름과 인간내면의 흐름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말할 것 같다. 조르바라면 뭔가라도 배워보려면 책따위는 집어 던지고 당장 박차고 일어나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말하겠지만, 오늘 밤도 책상앞에 앉아 책들을 뒤적이고 있다. 왠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탸를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