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허공 - 오규원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
종종 오규원 시인을 읽고 있습니다. 유고시집 두두에 나오는 나무와 허공이라는 짧은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쉬운 언어와 짧은 분량이지만 또 어렵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뭔가 의미를 찾아봐야 할 것 같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본인은 '내 시에서 의미를 찾지마라'고 합니다. 세잔을 좋아했다는 그의 '이미지의 의식'이라는 논리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렇습니다.
1. 인간의 궁극적 질문은 '나'라는 존재로 향한다
2. '나' =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시작과 끝
3. 그러므로 세계를 투명하게 인식하는 노력은, '나'의 존재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일이다
4. 시인의 작품 또한 하나하나가 세계이다
5. 그러므로 시인의 작품 세계 또한 나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6. 그런데 시인은 이미지로 사고하고 이미지가 사고하도록 돕는 자이다
7. 그러므로 세잔식으로 말해서, 시인은 이미지의 의식이다.
8. 그래서 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
9. 그리고 이미지가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한에서
10. 나는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의식이다
언뜻보면 논리의 비약이 하늘을 뚫고 솟구쳐오를 듯하지만 딱히 틀렸다 하기도 힘든데다가 그 진지함과 시에 대한 사랑에 일종의 감동이 있습니다. 투명하게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시로 전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 시인의 일인가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와 허공이라는 짧은 시는 아름다워 보입니다. 잎이 떠난 자리를 하늘이 허공에 맡긴다고 표현하는 간단한 시에서 우리는 떠나는 일, 죽음, 상실의 허무함을 말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그러함을 순수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사랑의 매개체로서의 기억 - 프루스트
앞으로는 작심삼일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마음먹어봅니다. 뭔가 해보려 결심하면 삼일을 넘기지 못하니....뭐든 삼일안에 끝내는 것으로... 해서 무슨 책이든 삼일안에 끝내는 걸로....못하면 안읽는걸로~~? ㅎㅎ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3권을 이제 막 끝내었는데요. 여기서 주인공 마르셀은 질베르트와 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별 후의 새로운 사랑의 시작의 변론을 하는데요 말하자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와 관련된 사랑의 몽환적 요소(주로 기억에 의존하게 되는)로서의 대상물이 없으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은 마치 사랑이란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여서, 다른 존재에 대한 실체적인 사랑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것 같다는......(제가 생각해도 설명이 더 어렵네요~~ㅜㅜ) 쉽게 말하자면 '누군가와의 사랑에는 특정 사물이나 언어가 함께 있다. 그 매개체가 없다면 사랑이 사라지는데 망각속에 묻혀두었던 기억이 그 매개체로 인해 다시 떠오르면 예전의 사랑하던 그 자아가 다시 튀어나와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 다시 빠져든다. ' 이런 내용의 표현들입니다.
사물존재의 의미를 바라보는 오규원과 프루스트
그런데 오규원 시인은 시로서 바라보는 세계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의 현상의 날이미지입니다. 내 시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고 하는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시선인 것이겠지요. 프루스트가 설명하는 세계에서는 자신과 특별히 관련되어 있는 사물이 가진 의미와 가치, 그것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들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심리적인 본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세계안에서 존재하고 인식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프루스트는 세계를 접하는 지점에서 인간 내면의 심리가 어떤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선들의 이론적인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둘 모두의 설명이 서로 다른 반대의 주장인것처럼 보이면서도, 각자의 논리에 충실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통하여 내놓은 결과물들이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나왔구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비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에 충분한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만 해도 근심걱정이 끝이 없거나 혹은 먹고 사는 문제가 없다면 더욱 더 관심가질 필요가 없어보이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또 왜 필요한가? 라고 한다면 그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고 또 죽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가 없네요 저로서는.....(궁색한...)
베케트의 고도를 찾는 것처럼, 카프카의 성문을 두들기는 것처럼, 프루스트의 기억과 망각을 뒤적거리는 일처럼, 죽기전에 언젠가는 내 안의 그 허전함과 세상의 의미와 무의미를,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싶습니다. 살다보면 일상의 시공간에서는 결국 내 가족, 내 주면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 이유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통해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며 세상을 인식하는 자신을 관찰하며,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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