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과 이제니 흉내내기와 제목 짓기의 감각
제목 : 망각의 숲
숲을 걷는다 잊기 위해서 걷는다 걷다가 어느새 계곡을 따라 걷는다 걷다가 잊기 위해 걷는 걸 잊는다 잊기 위해서 걷지 않는다 다시 찾기 위해 걷는다 걷다가 찾지 않는다. 찾지 않으려 걷는다.....
걷다 보면 졸리고 찾다 보면 졸리고 졸려서... 바로 포기합니다.....ㅎㅎ 포기하고 오랜만에 이제니의 시집을 한 권 골라봅니다. 뛰어난 언어의 조각가인 이제니의 시를 보면서 감탄을 하기도 하고 뭔 말인지 모르겠어서 얄밉기도 하고 그러네요~ 제목만 골라봐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너의 꿈속에서 내가 꾸었던 꿈을 오늘 내가 다시 꾸었다"
"어떤 고요함 속에서 곡예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리는 밤"
이제니 시인은 확실히 뛰어난 감각으로 제목을 짓고 엄청난 리듬감으로 시를 이끌어갑니다. 다만 나태하고 느려터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나의 뇌가 아쉬울 뿐입니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라는 시집의 시 제목들 중 유난히 허공에 맴도는 제목 하나가 있습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라니... 한눈에 안 들어오면서 문장 자체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맞지 아니한 말 같기도 하고....
바꿔보면
"없었던 것이 없었던 곳에는 없었던 것이 없었던 것처럼 없었다"라거나
"없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라거나
"없었던 것이 없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라거나
"있었던 것이 없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없었던 것처럼 없었다"라거나 등등등....
여러가지 버전으로 바꾼다 해도 시의 내용이 그다지 크게 바뀌지 않을 것도 같고... 그렇다면 이런 표현들의 시는 무엇을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인지..... 그래도 확실히 어떤 느낌? 감각? 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느낌은 또 정확히 뭔가 생각해 보면 흐릿하고 모호해서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서 명확히 밝혀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그것이 또 쉽지 않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확실히 현대시는 사유의 시세계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작가들은 깊고 깊이 파고 들어가 그 미세하고 섬세한 내면의 결을 포착하고 그려내는 작업을 해나가는 것 같고, 그래서 시인이고 작가이고 하겠지요? 독자들 또한 자꾸만 사유를 강요받기도 합니다만 어차피 잘 모르는 것 내 맘대로 읽으면 또 어떤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천천히 보다 보면 하나하나의 문장들에 작가들만의 신중한 고민 속에서 표현해 내는 내용들을 하나씩 발견한 것 같은 재미도 있는 것 같고요~ 그 와중에서도 이제니는 그녀만의 새로운 리듬과 목소리를 창조해 낸다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니의 시 한 편 소개드려봅니다.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 이제니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진다. 가지 하나조차도 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낮이다. 두 팔 벌려서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길가 작은 웅덩이 위로 몇 줄의 기를띠가 흐르고 있었다. 몇 줄의 기름띠 위로 작은 무지개가 흐르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번지고 있었다. 한 장면 두 장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닥을 향하는 서늘함이다. 투명하고 빈 공간이 있는 하얀색이다. 귀를 기울여 익숙한 소리들을 걸러낸다. 어떤 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고요한 것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화체의 기본적인 구조를 숙지하고 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한다. 낯선 것일수록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 있습니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해 온 얼굴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돌은 모든 것을 보고 돌은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 너와 나라는 두 개의 문이 열린다. 가지가 가지로 자라나듯 목소리가 목소리로 이어진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바닥에는 몇 개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죽은 것이 죽은 것으로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간다. 흐르고 있는 그림자를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 하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환한 빛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과 함께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본다. 당신을 만나는 심정으로 돌을 만난다.
시를 따라가는 마음으로...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이 돌은 어떤 돌일까? 싶습니다. 처음엔 그저 돌의 무심함, 차가움 같은 속성을 옮겨본걸까 싶었다가,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둥글게 깎이는 돌처럼 조금씩 약해져 가는 마음의 흐름을 전하는 걸까 싶었다가, 그저 걷다가 보면 도처에 깔린 돌들에게서 그만큼 흔하게, 나도 모르게 바로 옆에 있었던 걸 알게 되는 그런 느낌일까 싶기도 하고... 돌처럼 '당신은 곳곳에' 서 있었던 걸까요? 당신은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은 사라짐으로 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여기저기 곳곳에서 보이기도 하고, 길가 웅덩이에서 기름띠를 발견하고, 무지개를 보고, 한 방울 두 방울 번지는 장면에서 추억이 번지고, 추억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서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라는 표현대로 언제든지 떠올리고 지우고 다시 떠올리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라는 표현은 이제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몸 어딘가 영문도 모르고 울리는 통증처럼, 멈춘 시간, 사라진 시간, 가라앉아 살 수 없었던 시간, 올 수도 있었으나 오지 못한 시간들을 감각합니다.
당신은 사라지고, 사라지지 않은 당신의 부재라는 사태는 곧 죽음과도 같고 나뭇가지를 보면서도 '죽은 것이 죽은 것으로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나직이 읊게 됩니다. 부재는 '흐르고 있는 그림자'이고 경계하며 끌려 들어가지는 않을 수 있으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있어왔던 일들은 다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럴만한 시간들을 지나왔고, 그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당신 대신 당신의 부재를 안고서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의 중간중간의 시어들을 단서로 이야기와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아 지네요. 단어와 단어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일은.. 나름 소박한 기쁨이 있습니다만.... 역시나 시는 세상 쓸데없는 일일 뿐인가 싶은 생각도 들어 좀 착잡하기도 합니다. 이상 제가 읽은 시의 해석/감상을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추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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