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無法)
- 오규원
사람이 할 만한 일 가운데
그래도 정말 할 만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진지해야 한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상당한 정도 진지해야 한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왜 진지해야 하나?
오규원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무법이라는 이 시는 잘 알려져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가 가진 기본적인 세계관은 심플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인은 사람이 할 만한 일, 귀하고 의미 있는 좋은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라고 조용히 말합니다. 이 시는 참 쉬운 언어로 평범해 보이는 진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인의 표정이 '진지해야 한다', '상당한 정도 진지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덧붙이면서 약간의 혼란이 옵니다.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이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의 근거 없음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동어반복으로밖에는 전해지지 않을 사랑의 근거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요. 시인의 표정이 진지해야 하는 이유가 '사람 사랑하는 일이 그래도 정말 할 만한 일'이라는 표현이 비어 있고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이 없네'라는 말은 더 비어있고 더 의미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말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라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답하는 실없는 대화가 사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수없이 많이 있어왔던 상황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참 실없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사랑의 단상과 무법
사랑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상황을 그려보이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에게는 어떤 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도전의 길을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은 때로는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고 어이없을 수도 있겠으나 규정된 법안에 갇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무법자이고 그의 사랑은 일종의 추락이고 탈주입니다. 그리고 매우 진지하고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시인이 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노래할 때면 제법 진지해야 하겠습니다. 가만 읽다 보니 논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유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이런 시가 좋은 시일까요? 시란 참 이상하게 다가오는 글인 듯합니다. 상징계의 논리와 질서 속에 묻혀사는 생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시를 만나면 알쏭달쏭하면서도 차분해지기도 하고 살짝 진지해지면서 부드러운 마음결을 쓰다듬어볼 여유가 생기기도 합니다. 시의 매력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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