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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사놓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정작 펼쳐보지는 못하고 있다가는 몇년만에 펼쳐봅니다.
아 이런... 나는 여태 책을 어떻게 읽어온 것인지.....얼마나 수준낮은 독자였는지.....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올해 프루스트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인생책을 만나는구나 싶은....
이건 무슨 천재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인지.....
굳이 필요없는 자괴감까지도 느껴보게 됩니다.
아직 첫 번째 단편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와 바빌로니아의 복권들 두편을 읽었습니다.
정말 택도 없이 얕은 독서수준으로 인한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단편은 단편소설이 아닌 지식백과사전의 일부 목차의 소개 정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틀뢴이라는 혹성의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고, 세계는 물질들의 집합이 아닌 독립적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라고 합니다.
공간적이지 않고 시간적이며 연속적입니다.
해서 틀뢴의 남반구 언어들의 특징은 명사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명사 <달>은 없고 '달뜨다', '달이 비추다' 라는 개념의 동사들을 대신 사용합니다.
한편 북반구 언어들의 특징은 명사들이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의 밝은', 또는 '하늘의-오렌지빛의-부드러운'이런 식으로 말이죠.
해서 무한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상당히 시적이네요~
언어의 특성 뿐만 아니라 철학, 과학, 심리학,수학, 문학등 다양한 분야의 틀뢴만의 독특함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극도로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가능할 수 있는 다양한 학문적 세계를 예시로 보여주고 있는데요....저에게는 좀 많이 어렵습니다....ㅎㅎ
어렵지만 매력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현실의 세계를 비꼬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은 진실성을 추구하지 않고 놀라움을 찾으며, 형이상학을 환상문학의 한 지류로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철학에서의 (?) <하나의 체계>란 어느 한 관점에 우주의 모든 관점들을 종속시키기 때문에 오류입니다.
<모든 관점들>이라는 표현도 현재 순간과 모든 과거의 순간들의 통합을 전제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표현입니다.
<과거 순간들>이라는 복수형은 시간의 연속성을 감안해 볼 때 틀린 말이 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형이상학은 환상문학이 되어버립니다.
왠지 지구에서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시간에 관한 표현에서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현재란 규정될 수가 없는 거고,
미래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마치 현재적 기다림과 같고,
과거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현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사실 실제로 주장한 회의주의적 시각으로 주장한 철학자가 있다고 하네요.
시간에 대해선 여기저기 너무나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과학쪽으로는 시간이란게 없고 시공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도 있더군요.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한술 더 뜨죠
보라, 여기 순간이라는 것을!
여기 순간이라는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로부터 길고 영원한 골목길 하나가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필히,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을 것이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필히,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행해졌고, 지나가버렸을 것이 아닌가?
영원회귀사상의 표현 중 하나로 보입니다.
앞뒤의 맥락으로 보면 시간이 원형이라는 표현은 아니지만 영원성과 확률적 반복(?) 가능성으로 읽혀지는거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틀뢴의 입장에서는 니체를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순간 순간의 짧은 기억,생각,감정들을 한없이 늘려 수십페이지로 표현하는 반면에,
보르헤스는 그 만큼의 분량에 한 혹성의 문화, 역사, 학문들을 압축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무인도에 가져가야 할 한 권에 책에 보르헤스는 좀 어렵지 싶습니다.
다른 수 많은 보조자료를 구할 수 없다면 읽어낼 수가 없어 보이니까요~ㅎㅎ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읽어봤는데 요건 또 쉽게 나가는 단편입니다.
두 편의 단편소설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보르헤스는 예술로서의 문학보다는 뭐랄까 사고실험으로의 문학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복권'을 읽고보니 답안나오는 <우연 vs 필연>의 질문에 붙잡혀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현실 세계가 아바타 세계이고, 사실은 저기 천상 어디에서 추첨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되어지고 있다면?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내가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나를 아바타로 사용하는 누군가가 복권 추첨을 잘 못해서였다면?
그렇다면 인생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저는 그냥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라는 애매한 답을 정답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바타든 아니든 추첨이 있든 없든 간에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것은 맞는것 같고, 우주와 시공간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기반으로 지금 이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을 수 있었던 확률에 의해 필연이라고 생각하면서......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깊이 들어가려면 보르헤스 정도의 깊이와 넓이가 필요할 것 같고 해서, 이제 좀 가볍게 살아야겠다 싶습니다.~~ㅎㅎ
어쨌거나 문학의 세계에서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명작중에 명작, 명품중에 명품인 것 같습니다.
한줄평 : 당신의 뇌가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껴보게 하는 책.
평점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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